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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르노 Louis Renault (1877~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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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하 작성일17-12-24 11:33 조회6,5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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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기계를 다루는 일이라면 천부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던 루이 르노는 13세 때인 1890년 당시 전유럽을 놀라게 했던 세르플레의 자동차를 타보고는 홀딱 반해 자동차를 만들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20살이 된 그는 학교 공부를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자동차에 빠져들기 시작해 드 디옹 부통(De Dion-Bouton) 엔진을 한 대 사서 분해해 보며 경험을 쌓아 나갔다. 그러다가 1898년 군에서 제대한 루이 르노는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컸던 드디옹-부통 자동차회사에서 3륜 자동차 한대를 사다가 이것을 개조하여 루이 1호를 완성 하였다.

얼마 후 270cc 1.75마력에 32km/h의 최고속도를 내는 2인승 차인 루이 1호차가 탄생하는데, 당시 벨트나 자전거 체인으로 엔진의 구동력을 뒷바퀴에 전달해 움직인 것에 반해 루이의 차는 프로펠러 샤프트와 디프렌셜 기어를 통해 뒷바퀴를 구동하는 방식이었고 이는 오늘날 자동차가 가지는 구동장치의 시조가 되었다. 완성된 그의 1호차를 친구에게 시승시켜 주었고, 친구는 루이의 차가 너무나 맘에 들어 바로 계약금을 주며 한 대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루이의 차를 다시 소개하여 12대나 더 주문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루이의 차는 첫 차가 만들어 지자 마자 바로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경우였다.
첫 차가 만들어진 다음 해인 1899년 루이는 형들인 페르낭(Fernand)과 마르셀(Marcel)을 설득해 본격적으로 자동차회사(the Societe Renault Freres, 르노형제들의 회사란 뜻)를 설립하고 같은 해에 열린 파리 산업박람회에 르노 1호차를 출품하여 60대를 주문 받았다. 루이의 차는 당시 프랑스의 다른 차보다 가볍고 운전하기 쉬운 소형차였기에 이목을 끌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자동차 사업을 같이 하게 된 르노 형제는 자연스럽게 자동차 경주에서의 좋은 성적이 곧 판매증가로 연결될 거라고 예상하고 국내외 경주에 가능한 많이 참가해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미친 사람들의 경주"라 불릴 만큼 험악한 경주였던 1901년 파리-베를린 경주와 험준하기로 유명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했던 1902년의 파리-비엔나 경주에서 모두 우승하여 르노 차의 우수성을 알렸다. 다음해에도 역시 르노 형제는 파리-마드리드 경주에 참가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경주에서 마르셀이 사고로 죽게 되었다. 같이 참가했던 루이는 마르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경기 도중 르노팀을 모두 철수시키고 파리로 돌아왔다.
형의 죽음을 경험한 르노 형제는 이후 자동차 경주를 포기하고 승용차 개발에 전력을 모았다. 1905년 1060cc 2기통 엔진을 장착하여 60kmh의 최고속도를 내는 새로운 모델인 AG가 선보였고, 특히 4인승 쿠페형은 파리와 영국 등 유럽의 거리를 누비는 택시로 유명해졌다.
이후 페르낭도 1909년 자동차 경주에서 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루이 혼자 회사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여 최초로 지붕있는 자동차를 생산하여 파리의 여인들로 부터 대 환영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1920년대 프랑스에서는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인한 경기 위축으로 소형차 수요가 많아졌고, 르노는 시트로엥(Citroen)과 함께 소형차 제작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르노에서 개발한 950cc 소형 르노 6CV가 1927년 사하라 사막 횡단에 성공한 것에 힘입어 르노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1930년대 초에는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여 현대화의 기반을 갖추었다.
그러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 루이는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공장의 유지를 위해 독일군에 공급할 트럭을 생산하는 등 독일군에 협조하였다. 그러나 1944년에 파리가 독일점령에서 해방되자 루이는 전범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그 해 10월에 풀려났으나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인하여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을 마감하였다.

루이의 사망 이후 1945년에, 프랑스 정부는 그가 적국에 협력한 것에 대한 일종의 '벌'로서 르노를 국유화시켰다. 르노가 국유화되긴 했지만, 1946년 프랑스에서 전범으로 투옥되어 있던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가 디자인한 소형차 르노 4CV가 파리 자동차 박람회에서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50년대 이후 프랑스의 국민차로 자리잡는 등 르노의 명성은 유지되었다. 특히 포르쉐가 디자인한 독일의 국민차 비틀(Beetle)을 닮은 르노 4CV는 1964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무려 111만대가 팔릴 정도로 르노의 인기 모델이었다. 르노 4CV의 후속모델로 선보인 도핀느(Dauphine) 역시 비틀처럼 엔진이 뒤에 있는 소형차로 1968년까지 거의 200만대를 생산해 르노를 프랑스 제일의 자동차회사로 발돋움시켰다.

이후 르노는 1970년대 석유파동과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커다란 적자를 입었을 뿐 아니라 점점 거세지는 일본 차의 공세 속에서도 꾸준히 첨단기술의 자동차를 만들어 오고 있다.  또 1960년대 후반부터 창업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스포츠카를 만들어 랠리,그랑프리 등 국제 레이스에서 지금까지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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